한국침례교회의 개척자 말콤 펙윅

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기사입력 2018.11.3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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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인으로 독립선교사로 내한했던 말콤 펜윅(Malcolm Fenwick, 片爲益, 1863-1935)은 자비량 선교사이자 찬송가 작사 및 작곡, 성경번역과 한국에 대한 저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였으나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다. 2010년 침례교신학대학의 안희열 교수가 그에 대한 연구 시대를 앞서간 선교사, 말콤 펙윅(침신대출판부, 2010)를 출판한 바 있으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인물이다. 그가 한국에서의 침례교회 설립의 시원이 된다 하여 침례교에서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선교사였을까?
 
말콤 펜윅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마크햄(Markham)에서 태어났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농업과 철물도매업을 하던 중에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하여 복음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선교사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비록 녹슬고 찌그러진 통이라고 할지라도 생명을 구하는 물을 나를 수 있다는 강사의 간증에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일생을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18891228일 독립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당시 조선에는 식인 풍습이 있고, 헤론의 부인은 투옥되어 교수형에 처해 졌다는 등 근거 없는 풍설이 퍼져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위험에도 개의치 않고, 복음 전하는 이들을 위해 우산이라도 들어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조선으로 왔다. 내한한 그는 서경조를 어학선생으로 10개월 동안 조선말을 공부하고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松川里) 곧 소래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개인 전도를 시작으로 개척 전도에 몰두했다. 피선교지에서의 신속한 적응을 중시했던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자신을 한국인과 동일시했다. 한국인 집에 거주하면서 한국인 복장을 하고 김치와 깍두기를 즐겨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한국인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의 교육 배경이 일천하다는 점을 깨닫고 우선 자신의 개발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893년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국 보스턴으로 가 보스톤선교학교에서 아도니람 고든(Adoniram J. Gordon)으로부터 선교훈련을 받고, 침례교 신앙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1896년 다시 내한하여 원산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한국순회선교회(The Korea Itinerant Mission)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한국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름 그대로 그는 순회전도를 통해 개척선교에 힘쓰는 한편 농사와 과수원 일을 하며 자급선교를 지향했다. 1900년에는 남감리교 선교사인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사 하인즈와 결혼했다. 1901년에는 충남 공주의 엘라딩 기념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선교회와 통합했다. 그는 공주에 성경학교를 설립했다. “선교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보다는 자국민들의 전도활동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확신하고 한국인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인 전도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교회 개척에 혼신의 힘을 다해 1906년까지 31개 처 교회를 설립했다. 그래서 190610월 충남 강경에 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했다. 이 교회가 우리나라에서의 침례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펙윅은교회(교단)의 전체 책임을 맡은 감독직에 올랐다. 펙윅의 신실한 동역자였던 신명균이 초대 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라 자급자족의 원리를 실천했고, 토착적인 선교사업을 추구했다. 일예가 간도 선교인데, 간도에 선교사 파송을 계기로 간도와 연해주에 대한 선교사역을 전개했다. 정리하면 펜윅은 한국교회의 요람지인 소래에서 한국인과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고, 원산에서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선교의 토대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흩어진 한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펜윅은 종종 자신의 배우지 못함을 말했지만, 그는 여러 측면에서 한국교회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복음찬미라는 찬송가 편찬과 함께 1891년 시작한 독자적인 신약성경 번역은 결실을 거두어 요한복음을 세 번에 걸쳐(1891, 1893, 1919) 번역 출판했는데, 이것이 기초가 되어 1915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그는 이 번역에서 성령숨님으로 번역하는 등 복음의 토착화에 주목했다. 1911년에는 펜윅 자신의 한국선교기라고 할 수 있는 The Church of Christ in Corea를 출판했고, 1917년에는 자신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선교적 관심을 드러낸 Life in the Cup을 출판했다. 펜윅이 저술한 이 책은 한국 초기 선교 사역을 소설 형식으로 기술했는데, 가상의 인물인 하퍼 목사와 존 플라우먼 선교사를 통해 자신의 회심과 한국 선교에 관한 문제점과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외에 만민됴흔긔별같은 전도용 소책자, 성경공부 교제, <달 편지>, 농사법 관련 글을 포함한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1889년 내한하여 일하면서 3년간 재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난 일 외에는 한국에서 떠나지 않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팩윅은 193512672세를 일기로 원산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3년 전에 사별한 부인 곁에 평장으로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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