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한국에서 일한 우리암(禹利岩, Frank Williams)과 우광복
기사입력 2018.04.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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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한국에서 일한 우리암(禹利岩, Frank Williams)
우광복(禹光復)
요즘 회자되는 이야기 가운데 공주대학교 총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선교비사, 우광복(禹光復) 이야기가 있다. 이런 내용이다. “100 여 년 전 젊은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 부부가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공주를 기반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인천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우광복인데, 영어이름은 조지 윌리엄스이다. 아버지는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우광복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올리브라는 딸을 낳았다. 그런데 아버지 프랭크는 1906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상여 집에서 잠시 비를 피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한 곳이라 프랭크 선교사님이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선교사 부인은 과부가 되어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에 돌아와 공주에 교회를 세우는 등 47년 간 사역하였다. 그런데 딸, 곧 우광복 여동생 올리브(1908-1919)11살에 죽어 영명동산에 묻힌다. 우광복은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영명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때가 해방 후 하지 장군이 군정 책임자로 다스릴 때였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그 사람이 우광복이었다. 우광복은 하지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광복은 엄마와 상의하고 50명을 추천했는데, 이중 4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정부 수립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다. 특별히 기독교인이 문교부 장관이 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고,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 토대를 마련하여 하나님 군대로 만들었고, 그리고 제헌국회 의원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연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기독교인이 5%도 안 되는 때였다. 그런데 윌리엄스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 만에 5백만이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 미군정 시절 우광복이 추천한 50명부터 시작되었다. 우광복은, 19948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데, 내 동생 올리브 옆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내 나라와 내 민족이 깨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되기를 기도한다.”는 내용이다.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지만 정보의 오류가 없지 않다. 은혜스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실과 다른 첨삭이 생겨 사실이 왜곡되기도 하는데, 사실(fact)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조심스런 검토가 없으면 다른 사실마저도 불신을 받게 된다. 프랭크 윌리암스(Frank Williams, 1883-1962)는 콜로라도 뉴윈저 출신인데, 던버대학을 졸업하던 1906년에 미북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이름은 우리암(禹利岩)이었다. 이듬해 공주지방에 배속되어 1940년까지 한국에서 일했다. 그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공주읍교회를 담임했고, 영명학교 교장을 지냈다. 충남지역 순회전도를 하며 농촌지도자를 양성했다. 대동아전쟁의 전운이 감돌 때인 1940년 추방되어 인도로 가서 잠시 일했고, 해방 후에는 군정청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장군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내한했다. 6.25 사변이후 선교사직에 복귀했다가 1954년 은퇴했고, 196269일 샌디에고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George Zur우광복’(1907~1994)인데 그를 선교사로 호칭하지만 사실 그는 해군 군의관(중령)으로 한국에 왔는데, 하지 군정시절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었는데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가 해방 후 내한하여 우리나라를 위해 봉사한 점 등 귀한 봉사사자란 점은 분명하지만 어머니의 자문을 받아 50명을 추천했다고 하지만 이 점도 검토가 필요하다. 우광복은 비록 선교사로 파송 받지는 못했지만, 선교사의 자녀로서 해방 후 한국 건국기에 쓰임 받은 헌신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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