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규교수의 선교사이야기'린튼가의 선교사들4'

기사입력 2018.03.2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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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튼가의 선교사들4
<스티븐 린튼과 존 린튼 >
휴 린튼(印休, 1926~1984)은 슬하에 32녀를 두었는데, 이 중 차남 스티븐(인세반, 1950- )과 삼남 존(인요한, 1959- )4대째 한국 선교사가 되었다. 전라도 순천 토종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한국인과 똑 같이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신을 전라도촌놈이라고 불렀다. 스티븐은 유진 벨재단의 회장으로 북한을 돕는 사업을 하고 있고 특히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삼남 존은 연세대학교 가정의학과 교수, 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형님의 사역을 후원하며 북한에 구급활동을 위해 앰뷸런스를 보내는 등 북한 의료지원에도 관여하였다. 특히 그는 특별 귀화자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휴 린튼 부부는 자녀들이 중학생이 되면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암송하게 했다고 한다. 1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이고,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11:36, 4:11, 73:25, 26)”인데, 이런 가르침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스티븐 린튼은 1950년 미국의 노스케롤라이나에서 출생했다. 4살 때 한국으로 돌아와 순천에서 생활하며 한국아이와 똑 같은 교육을 받았다. 즉 순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폐결핵에 감염되어 학교를 중단하고 홈스쿨링으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한복을 입고 자랐다고 한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대전 외국인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한국어를 알았으나 군인이나 외교관 혹은 사업가의 자녀인 동료들은 한국말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며 공부했고, 6주에 한번 꼴로 순천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1968년 중등학교를 마친 스티븐은 미국 플로리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군입대로 휴학하게 되었고 한국어에 능통하다는 점 때문에 용산의 미8군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고 전역 후에도 한국에 남게 되어 미국에서의 대학교육을 포기했다. 1971년에는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75년 대학을 졸업했다. 이 때 다시 미국으로 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에는 한국으로 나와 부산의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이때의 수학은 길지 못했다. 필자는 이 때 송도교정에서 스티븐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런 수학의 여정에서 1979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북한을 알아야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고 한국학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한국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게 된다. 이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 한국학연구센터 부소장을 맡으면서 본격으로 동아시아를 연구하게 된다. 1989년에는 콜롬비아대학 학술교류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시 방문하면서 북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북한의 열악한 의료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1992년 빌리 그래함 목사가 북한을 방문할 때 그도 삼촌 토마스 린튼(Thomas Dwight Linton, 인도아)과 함께 통역요원으로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이런 북한 방문이 그로 하여금 북한을 돕는 자선기관 유진벨기념제단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식량지원사업으로 출발했으나 1997년부터는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했다. 이 기간 곧 1995년부터 97년까지 100개의 컨테이너 1만여톤 분량의 식량을 북한에 전달했다고 한다. 스티븐 자신이 두 번이나 결핵을 앓았는데 북한에서 결핵은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외부의 후원 없이는 결핵을 치료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북한 당국자가 결핵 퇴치 사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콜롬비아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한국인 김원숙 씨를 만나 1980년 결혼했으나 후에는 이혼했다. 슬하에 11녀를 두었는데 입양한 아이들이었다.
삼남 존 린튼 곧 인요한은 형님들처럼 순천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고 한국에서 계속 공부하게 된다. 그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는데, 그가 국내의사면허를 가진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었으나 한국인과 똑같이 의학공부 할 때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일하면서 형을 도와 북한의 의료지원사업을 벌이고 있고, 2006년에는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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