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교수의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9)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설교세계
기사입력 2017.09.13 12:2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9)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설교세계
조성현.gif
 
 
들어가는 말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연구함에 있어서 각 개혁가들의 다양한 신학과 성향이 존재한다. 대체로 로마교회에 대하여 미온적 개혁, 중도적, 그리고 철저한 개혁을 시행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성서에 입각해서 가장 철저하고 과격한 개혁을 시도한 인물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를 지목할 수 있다. 루터보다 1년 늦게 태어났지만 루터와 모든 면에서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역사에서 루터만큼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가 오직 믿음을 통하여 로마교회를 개혁하려 했다면, 츠빙글리는 오직 설교를 통하여 가장 강력한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사회 윤리적 개혁자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루터와 상당히 많은 부분 비교된다. 라토릭(Kenneth Scott Latourette)기독교의 역사(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째, 츠빙글리는 루터처럼 영혼의 고통을 통한 종교적인 체험을 갖지 않았고 성직의 순결함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의 학문적인 관심이 많았으므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탐독하고 그것을 상당히 암기하였다. 그러나 이태리에 스위스 용병 군종사제로 참전하면서 몸과 영혼을 파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강하게 저항했다. 둘째, 루터와 달리 설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성만찬의 견해를 루터와 달리했다. 루터는 성물에 그리스도가 임재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츠빙글리는 단순히 상징(memorial)으로 성찬을 규명했다.
츠빙글리는 148411일 스위스의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의 빌트하우스(Wildhaus)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저명한 가정으로 양육 받으며 베른, 비엔나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바젤에서 대학을 마치고(1504), 1506년에 인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지만 루터와 달리 박사학위는 없었다. 특별히 그는 휴머니즘,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성서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1506년에 사제로 서품 받아서 1516년까지 글라우스(Glarus)에서 10년간 목회하였지만 사임 요청을 받고, 아이스델른(Einsiedeln)으로 임지를 이동하여 거기서도 휴머니즘에 대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151911일 취리히의 주임신부로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 교회에 부임하여 그 당시 행하던 설교와 달리 성경한권을 선택하여 연속하여 강해설교를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는 조항을 비롯하여 교회와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67개 조항'(Sixty-seven Theses)을 스위스 의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음으로 그의 종교개혁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1531년에 스위스에서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과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주끼리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츠빙글리는 종군사제로 전투에 참여했는데 아쉽게도 카펠(Cappel)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했다. 츠빙글리의 삶은 개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로마가톨릭에 대하여는 면죄부, 화체설, 성모마리아 상, 성상 등의 해체와 파괴를 주창하며 강력한 종교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재세례파에 대해서도 자신의 개혁을 진행시켰다. 특별히 루터나 칼빈과 다르게 츠빙글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로운 교회와 사회를 어떻게 구축해낼 수 있을까?”를 평생의 과제로 여겼다. 츠빙글리의 개혁의 방향은 개인이나 교회를 넘어서서 사회의 변혁까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츠빙글리의 설교 특징들
대부분의 종교개혁 설교자들은 중세의 미사 중심에서 설교중심으로 위치이동을 하였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적인 차원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을 한 설교자를 지목한다면 주저 없이 츠빙글리를 들 수 있겠다. 로마 교황청에서 주창해왔던 대부분의 예배 예전을 무시하고 파기하고, 심지어 루터와 성만찬의 논쟁을 하면서도 오로지 설교하나만 철저히 붙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전장에서 전사하기까지 그토록 외쳤던 설교는 잘 보존이 되어 지지 않고 몇편의 요약설교만 있음으로 인해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설교에만 오로지 집중한 개혁적인 설교자였다. 츠빙글리의 예배개혁은 설교개혁으로 이어진다. 예를들어 로마교회의 화체설이나, 미사 시 보여지는 성상을 피괴하고 제단을 철수 시키며, 십자가를 비롯한 상징물을 철거하고, 성경에서 제시하는 악기를 제외하고는 예배음악에서 사용을 불허하는 강력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드리고 다른 피조물에게 하는 경배와 찬양은 절대 불허했다. 정장복은 말하길 그는 로마교회가 가진 일체의 신조나 예전을 부정해버리고, 매주일 가졌던 성찬도 기념적 성찬(Memorial feast)으로 의미를 축소시켰으며 성찬도 1년에 4회로 제한했다고 했다. 교회력을 중시한 루터의 설교와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그는 예전적인 교회력 때문에 설교의 위치가 약해질 수 있고,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강한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설교중심의 예배는 개혁교회의 대대로 이어내려 오는 전통이 되었다.
둘째, 인문주의 사상으로 경도(傾倒)된 학문적 설교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영적인 깊은 고뇌와 방황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대신 에라스무스(Erasmus)나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서 인문주의 사상에 심취되었다.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그의 태도는 학문적 결과로 탄생되었는데 설교자 양성을 위한 목회자 재교육 모임인 프로페차이’(Prophezei)이다. 프로페차이는 성경연구, 성경주석, 그리고 설교 준비 모임으로 성서주석 작업과 함께 성서를 번역한 결과 그 열매로 1531년 신구약성서의 독일어번역(취리히 성경)을 완성하여 인쇄하였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지성적이고 학문적인 노력은 후학들에 의하여 지금도 아름다운 결실이 맺히고 있다.
셋째, 책별 연속 강해설교를 하였다. 루터가 절기와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한 것에 비하여 츠빙글리는 책별 연속설교를 하였다. 이런 설교 형태는 상당히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151912일부터 취리히에 위치한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 교회 목사로 취임하면서 마태복음 강해설교를 하였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성경중심으로 책별 강해를 하면서 6년 만에 신약전체를 강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개혁교회의 성경 연속강해 전통인 렉시오 콘티누아’(Lectio continua)의 기초석이 되어서 성경중심의 강단 개혁의 좋은 본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약점으로는 약 3만 번 이상 설교하였지만 속기사도 없는 상태에서 원고없이 설교하였기에 소량의 설교만 현대에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목소리가 유약했고,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설교가 전달됨으로 자칫 설교가 투쟁의 도구가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는 설교에만 오로지 집중하여 예배에서 설교의 위상을 힘 있게 높이고 강조하여 개혁교회 설교의 기초를 놓은 귀한 개혁자라 평가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츠빙글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설교가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에만 초점을 맞추는데서 더 나아가, ‘성숙한 사회시민이 되기까지 설교한 츠빙글리의 설교의 공적신학의 모습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하는 설교자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저작권자ⓒe뉴스한국 & enkorea.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30873
 
 
 
 
  • e뉴스한국(http://enkorea.kr)  |  설립일 : 2003년 6월 20일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98 부산 YWCA 304호
  • 발행인 : 박수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정
  • 사업자등록번호 :  605-90-93848
  • 대표전화 : 051-462-5495 [오전 9시!오후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메일주소 : enews88@hanmail.net
  • Copyright © 2007-2009 enkorea.kr all right reserved.
e뉴스한국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