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수(萬病水) 약을 개발한 어을빈 의사-이상규 교수

만병수(萬病水) 약을 개발한 어을빈 의사
기사입력 2017.08.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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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만병수(萬病水) 약을 개발한 어을빈 의사
요즘 부산에서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어빈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기 회자되고 있다.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는 18919월 온 윌리엄 베어드였는데,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일하다가 대구에서 잠시 체류한 후 서울로 옮겨갔고, 2년 뒤인 1897년에는 다시 평양지부로 배속되어 평양으로 갔다.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온 북장로교 선교사는 189112월 부산에 온 휴 브라운(1867-1896) 의사였다. 부부가 의사였던 이들은 부산에 온 첫 의료선교사인데,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를 마련하고 의료사역을 시작했으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2년 후인 189418일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2년 후 18962월 브라운 의사는 뉴욕에서 병사했다. 브라운에 이어 부산에 온 북장로교 의료선교사가 바로 찰스 어빈(Dr Charles. H. Irvin, 1862-1933)이었다.
한국인 어을빈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크게 두 가지 기여를 했다. 첫째는 정킨기념병원을 세우고 의료활동을 전개한 일이다. 부산에는 오직 메리 콜린스 휘팅 시약소만 있었으나 어을빈은 19039월 부산,경남지방 최초의 근대 병원인 정킨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을 초량에 건립했다. 이 병원은 어빈 의사의 모교회인 미국 뉴저어지주 몬트클레어(Montclair)에 있는 제1장로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다. 이 교회 전임 목사가 정킨(Rev. William F. Junkin)인데 그를 기념하여 병원건립기금을 보냈으므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어을빈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것도 바로 이 교회였다. 다른 한 가지는 부산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보호시설을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한국에는 나환자들이 많았으나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1904년 어을빈은 북장로교의 빈톤 의사, 스미스(Dr W. E. Smith, 沈益順) 목사 등과 위원이 되어 나병선교회’(The Mission of Lepers in India and the East)의 재정지원을 받아 190911월 나환자 보호시설(Leper Asylum)인 상애원(相愛院)을 개원하게 된다. 이 보호시설은 1910년 공식적으로 개원하게 되었고, 호주 선교사 매캔지가 이 일을 주관하게 된다.
어을빈은 훌륭한 의사로서 한국인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그의 부인(Mrs. Bertha Irvin)1897년에 부산에 소규모의 야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규범학교(閨範學校)였다. 고아나 극빈 여아들을 위한 학교였고, 북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 裴緯良)18951월 설립한 첫 남자학교 한문서당’(The Chinese School)에 이은 여자 야학교였다.
그런데 어을빈은 부산에 온 이래로 베어드와 함께 지역 순회활동에 동참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료,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정킨기념병원에서의 사역도 대단했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1901년 보고서에 의하면 병원이 설립된 이후 약 8년간 약 6만명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 중 9천명은 어린아이들이었다고 했다. 수술 횟수는 2,500회에 달했고 4,400회의 왕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을빈 의사는 19113월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 현재의 코모도호텔 맞은 편 염광교회 근처에서 어을빈의원을 개원했다. ‘영선고개란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3거리-코모도 호텔 앞-메리놀병원 앞-카토릭센터-대청로 국제시장 입구 4거리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의미하는데 병원은 지금의 염광교회 쯤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을빈은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부인과 이혼하고 26세 연하의 한국여성 양유식과 혼인했다. 양유식은 양덕유와 한모악(한영일, 양영일로 불림)의 둘째 딸로서 양성봉 장로의 누이였다. 어빈 의사는 당시 한국에서 유명한 의사로 알려졌고 만병통치약인 만병수’(萬病水)를 개발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부인 베르타(결혼 전 이름 Bertha Kimmerer)는 어을빈과 헤어진 후 일본으로 가 도지샤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사제를 털어 교또에서 한인교회당건축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1934년 당시까지 일본 교또에서 아들 로드릭(Roderick Irvin)과 같이 살았는데, 아들은 일본의 곡산(穀産)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미국회사로 강냉이로 식품을 만드는 회사로서 평양에도 공장을 두고 있었다. 베르타는 1940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선교사로 그리고 의료인으로 42년간 한국에 체류했던 그는 193329일 부산에서 사망하여 복병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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