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교수의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3)'

기사입력 2017.03.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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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특징


설교의 암흑기인 중세교회
개혁교회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 교회란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되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시에는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왔지만 어거스틴의 사후(A.D. 430)부터 시작되는 중세교회에서는 이러한 균형이 무너졌다. 교회의 암흑기, ‘설교의 암흑시기’(dark age of preaching)가 도래한 것이다. 온전한 말씀의 선포는 거의 사라지고, 형식적이며 미신적인 종교적 요소가 가득하게 집례되는 성례전 하나로만 교회의 명맥을 천년동안 근근이 유지하였다. 중세시대의 전반적인 신앙의 모습은 성모 마리아나 성인숭배에 열을 올렸고, 제도와 형식에 억매여서 진부한 미사가 중심을 이루었다.
중세시대의 설교의 특징으로 첫째, 설교를 경청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식이나 마리아와 같은 성인숭배에 도취되었다. 둘째,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성직자들은 설교하기에는 너무 무지해서, 독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고, 회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위하여 수도원이나 금욕생활에 있었던 신비한 체험이나 이적들, 크리소스톰와 같은 교부들의 설교를 그대로 읽거나 수정을 가해 사용했다. 셋째, 설교는 점차적으로 예배의 중심으로부터 사라져갔고 화려한 미사의 예전에 질식을 당했다.
이에 맥스엘(William D. Maxwell)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에서 중세시대의 예배와 설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미사는 구경거리로 전락되었고, 미신적이며, 화려하게 장식된 의식, 알지 못하는 언어로 미사가 진행되어서 청취가 불가능하였다. 설교는 무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했으며,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너무나 무식해서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였다. 성경이 봉독되어야 할 자리에 성자들의 생활 이야기나 전설로 채워졌다.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는 성직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이에 종교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 이었다
그러나 설교의 암흑기인 중세시대에도 주목할 만한 한 설교자가 있었다. 바로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kairvaux)이다. 그는 2차 십자군 모집에 관여했는데 비록 우화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였지만, 중세의 다른 설교자들과 달리 독창적으로 자기설교를 할 수 있는 수사학 능력이 뛰어난 프랑스 설교자였다. 루터는 버나드에 대하여 칭찬하기를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경건하고 거룩한 설교자라고 평했다. 이는 중세시대가 설교의 암흑기이기는 했지만 다시 소생할 수 있는 희미하고 가느다란 빛줄기를 남겨 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를 연결해주는 설교의 다리이기도 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의 특징
종교개혁의 주역들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그리고 낙스(John Knox, 1513-1572)와 그 밖의 여러 설교자들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형식과 제도의 깊은 잠에 빠져있는 중세의 아성을 설교를 통하여 회중을 일깨웠다. 종교개혁자들 설교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설교에 큰 비중을 두며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중세시대의 제도와 형식에 갇힌 진부한 미사 중심에서 설교중심으로 예배의 구심점이 전환되었다. 브래트(John H. Bratt)는 말하길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방은 주일에는 두번 또는 세번의 설교가 있었으며, 주중에도 여러 차례의 설교가 있었다. 어떤 때는 설교자들이 한 주간 연속으로 설교했다고 언급했다. 예배에서 설교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회복이 일어났다.
둘째,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였다. 루터의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필두로 회중들이 삶의 현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내용으로 설교를 하였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신비적인 해석보다는 문법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을 통하여 회중들이 설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째, 연속 강해설교의 형태를 띠었다. 칼빈은 심오하고 풍부한 원어지식을 바탕으로 성경각권에 대하여 연속 성경강해’(consecutive exposition of the scripture)를 하였다. 츠빙글리 또한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의 도움을 받아 15191월부터 마태복음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를 하기 시작했다. 루터도 생활에 직접 관계되면서 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를 행했다. 이는 성경을 중시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중심적 태도가 성경본문을 깊이 주해하는 쪽으로 향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네째, 설교의 내용은 복음의 진수에 관한 것이었다. 설교내용이 표면적으로는 중세의 타락과 부패에 관한 논쟁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깊이 살펴보면 복음의 진수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 주를 이루었다.
다섯째,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였다. 개혁자들의 설교는 단순히 윤리적 이거나 교훈적인 설명을 넘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로 루터는 모든 성경 중에서 로마서를 사랑했으며, 율법과 복음의 도식을 가지고, 모든 설교의 중심 주제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 주제였다.
여섯째, 성령이 이끄는 설교(Spirit-led preaching)였다. 교회사가들은 말하길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해서 칼빈이 확산시켰다고 평가한다. 학자적인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였는데 미리 기도와 묵상, 철저한 준비를 거쳐 성경만 들고 강단에 올라가서 한 시간 동안 성령에 의지하여 설교했다. 그는 주장하길 설교준비 및 전달이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복음정신, 말씀의 재발견과 설교의 회복은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전 유럽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존 낙스의 사후(1572)를 기점으로 서서히 설교의 힘은 동력을 상실해갔다.   
나가는 말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의 강조점은 분명히 다르며, 설교에 관해서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타난다. “교회사의 암흑기는 항상 설교의 암흑기와 일치 한다는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교회사의 부흥기는 항상 설교의 전성기와 일치 한다고 볼 수 있다. 위기가운데 있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말씀의 횃불, 성경과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의 횃불을 들고 일어나서 불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조성현 교수
부산장신대 설교학 겸임교T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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