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연 교수의 성공을 노래한 작곡가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년)-2
기사입력 2021.08.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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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한곳에 머무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활동을 하고 독일로 돌아온 헨델은 많은 보수와 안정된 직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음악 중심지 중 하나였던 런던으로 1712년에 여행을 하게 된다. 짧은 여행계획으로 런던을 방문하였지만, 영국 여왕의 총애와 오페라의 성공으로 영국이 평생 그의 거주지가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헨델은 1727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 후 175975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삶 전체의 3분의 2를 영국에서 살았으니 영국인이라는 주장에도 무리는 아니다.

헨델 전기의 작가인 뉴먼 플라워에 따르면 헨델이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당시 주변 여건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영국 음악계 자체가 침체해 있었던 것은 물론 이고 헨델의 영국 음악계에서의 인지도나 영향력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열정적이고 흥행능력을 가진 공연 기획자 아론 힐(Aron Hill)’을 만나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 로 유명한 오페라 리날도를 성공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헨델의 명성이 런던 음악계를 진동시키게 된다. 헨델은 오페라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헨델의 오페라는 독일에서 4, 이탈리아에서 2편을 작곡했고 나머지는 모두 영국에 건너온 이후 30년간 작곡하고 공연한 작품들이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 왕립 음악학교(Royal Academy of Music)’ 등 오페라 극단을 창립하여 수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다산의 작곡가이자 영리한 정치가, 그리고 냉정한 사업가였다. 그는 거액의 돈을 벌었고 또 잃었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성격이 급했으며, 유머 감각이 있었다.

 

헨델의 이러한 오페라 사랑은 그가 젊은 시절을 영국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이 줄어들고 경제적인 문제가 위기를 맞으면서 1741년 이후에는 결국 오페라보다 오라토리오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오라토리오 29편 중 20편 정도가 174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헨델이 이처럼 음악 인생 후반기에 종교 곡과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게 된 것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에 근거한 것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많다. 그는 개신교도(루터교)이긴 했지만, 바흐처럼 성경을 밑줄 그어가면서 읽고 그 감동을 노트로 남길 만큼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재정상태가 악화하자 그 돌파구의 하나로 오라토리오를 공연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오라토리오는 종교적인 극음악이지만 연극과 무대장치가 없으니 제작비에서 오페라와는 비교되지 않았으며 언어도 오페라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했지만, 오라토리오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니 국민적인 감정도 나쁘지 않았다.

 

헨델의 종교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교회 분위를 살펴보면 루터교에서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로마교의 전례적 요소를 많이 남겨 두었다. 그에 따라 무미건조한 교의에 마음이 치유되지 않게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신비주의 신앙에 빠져, 두드러지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종교시나 찬송가를 쓰게 되었다. 그들은 루터교의 신앙에 비해 경건 파로 알려져 있으며, 후에 감리교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모라비아 형제 단도 이러한 경건주의적 신앙을 가진 부류들이었다. 이렇듯 과도기적인 혼란의 때 헨델은 서로 다른 교파에 대해 매우 관대해서 영국 성공회나, 가톨릭교회, 그리고 루터교나 칼빈교 등을 가리지 않고 음악을 작곡하는 자유로운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들은 대부분 어느 한 교회나 궁정에 소속되어 고용자인 성직자나 왕족의 교파 또는 취향에 따라 작곡의 방향이 결정되는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영국 음악계의 풍토는 교파 주의에서 벗어났으며 헨델은 이런 풍조를 선호하였을 것이다. 영국에서의 헨델은 자영업자처럼 공연을 통한 수익창출과 귀족들의 선의적 후원을 받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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