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교수 "존 낙스(John Knox)의 설교세계"

기사입력 2017.10.17 14:3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10)
 

 
존 낙스(John Knox)의 설교세계
 
종교개혁 인물 중에서 한 나라 전체에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주어서 변혁을 가져온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이다. 낙스는 칼빈의 신학과 정치사상의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수립하였으며 전 세계에 장로교의 본산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칼빈을 개혁교회의 창시자라 한다면, 낙스는 장로교의 아버지라 명명할 수 있다.
 
낙스의 생애와 개혁사상
장로교의 시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낙스로 부터 기원한다. 1560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의회의 승인을 얻어 채택됨으로 국가차원에서 장로교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스위스의 개혁교회인 제네바의 칼뱅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장로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낙스와 스코틀랜드를 이해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한국교회와 한국 장로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곳이기 때문이다. 낙스가 태어났던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런 상황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후진적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성직자의 윤리적인 타락이 극에 달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진용을 핀 프로테스탄트와 프랑스를 등에 업은 로마 가톨릭의 양 측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존 낙스가 태어났다.
낙스는 1513년경에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인근에서 출생했다. 글라스고 대학(University of Glasgow) 과 세인트엔드류 (St. Andrews)대학교에서 엄격한 고전적 신학수업을 받았고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급성장하는 신교도 운동에 가담하였다. 1544년에 루터교 개혁자 조지 휘샤트(George Wishart)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가 되기로 결정하고 회심을 하였다. 곧이어 그는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아 1547년에 세인트앤드류 성에 포위당한 개신교 군인들에게 설교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에 성은 함락되어서 개신교 군인들과 함께 19개월 간 갤릭선(galley) 노예로서 살게 된다. 프랑스 감옥에서 풀려나와서 1551년에 영국으로 가서 왕실 전속사제로서 사역하면서 점점 낙스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의 메리’, ‘메리 여왕’(Queen Mary)이라 불리우는 메리 튜터(Mary of Tudor, 재위 1553-1558)의 개신교도에 대한 핍박이 거세지자 제네바로 피신해서 칼빈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그의 앞날의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준 만남이었다. 1554년에 프랑프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계 피난민을 상대로 짧은 기간 동안 목회를 한 후, 1555년에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한 했다. 낙스의 설교와 저술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대적자들의 모함 때문에 1556년에 제네바의 영어권 이민 목회 제의를 수락한다. 이러한 결정은 낙스가 존경하는 칼빈으로 부터 신학적 교리와 교회 정치에 대하여 수학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1559년에 다시 스코틀랜드에 돌아와서 개혁교회 교리와 장로회 정치에 기초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를 지지하는 메리 여왕과 낙스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은 심각한 대립의 상태까지 갔지만, 낙스는 여왕의 권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길레스(St. Giles)교회 설교단에서 그녀의 죄악을 철저히 공격하였다. 결국 그녀는 폐위되고, 낙스는 1572년에 중풍에 걸려 기나긴 고난의 설교자의 생을 마감하였다. 자기 조국을 믿음으로 끝까지 사랑하며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낙스의 삶은 숭고(崇高)함을 넘어서 존경스럽다.
 
낙스의 설교 특징들
낙스의 정치적인 영향력과는 달리 설교 사역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20여년 간 스코틀랜드에서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두 편의 설교만 보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추측하기로는 정치적 격변기와 종교적인 혼란한 분위기 가운데서 규칙적으로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본인이 설교를 의도적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칼빈과 달리 속기사를 둘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었기에 대부분의 설교가 유실되어 후대의 설교자들의 연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낙스의 설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정신(ethos)을 지닌 열정적 설교자였다. 낙스는 선천적으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별히 설교에 관한한 두려움이 많았다. 낙스에게 설교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어느 설교자의 도전을 받았을 때 낙스의 모습에 대하여 팬트(C. E. Fant)와 핀슨(W. M. Pinson)은 표현하기를 낙스는 예기치 않은 엄숙한 도전에 압도되어서 회중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무리에게서 빠져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러나 마침내 이 소명을 받아들여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설교에 대하여 이렇게 소심한 낙스가 이후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설교할 수 있었다. 맥닐(John T. McNeil)칼빈주의의 역사와 특성(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에서 낙스의 설교열정에 대하여 낙스의 목소리는 500개의 나팔보다 더 강력할 정도로 생명을 구원하는데 열정이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열정의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낙스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서있는 믿음의 설교자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낙스가 메리여왕의 죄에 대하여 그녀를 이세벨로 비유하면서 설교를 했을 때 무서운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의연히 대처하면서 설교 할 수 있었던 능력은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전의식’(神前意識) 정신이 그를 붙잡아 주었기에 열정을 담아서 설교 할 수 있었다.
둘째, 전형적인 칼빈주의 설교이다. 스코틀랜드와 낙스의 관계에 대하여 패티슨(T. Harwood Pattison)스코틀랜드는 칼빈주의 승리이다. 존 낙스가 주로 칼빈주의를 스코틀랜드에 영광스럽게 처음으로 정착시켰다고 했다. 낙스는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철저히 받고, 칼빈의 사상과 신학을 체득한 후에 칼빈의 칼빈주의 설교의 특징을 그대로 전수 받았다. 브릴리오스(Yngve Brilioth)설교사(A Brief History of Preaching)에서 그의 칼빈주의 설교에 대하여 칼빈주의 설교전통의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존 낙스에게서 명쾌하게 드러났다. 낙스는 설교학적으로 주해를 한 후에 적용을 하였다고 했다. 칼빈의 설교의 기본적인 원칙에 대하여 에드워드(O. C. Edwards Jr.)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란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설교에 있어서 주석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낙스의 설교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받아 철저히 본문을 중심으로 주석과 해석을 하면서 예언적인 관점에서 적용을 하였다. 특별히 낙스의 설교가 예언적이라는 것은 그가 궁중 목사로서 재직하면서 막강한 권세가 있는 왕실과 여왕에게까지 직선적으로 왕의 죄를 지적할 정도의 담력과 확신을 소유한 예언자적 설교자였다.
 
나가는 말
소심한 성격 때문에 설교가 어렵다고 피하며 두려워한 낙스 였지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설교하는 정신을 가진 낙스는 자기를 핍박하는 왕을 비롯하여 어느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예언적 설교를 외친 약하지만 강한설교자 중의 하나이다. 이는 신전의식을 가진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는 진정 하나님 앞에서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하고 있는지? 아니면 설교를 가볍게 여기고 표절(剽竊)과 도용(盜用)이 습관화 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질문에 올바른 응답을 할 수 있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는 자격 있는 설교자가 될 것이다
조성현.gif
 
      
<저작권자ⓒe뉴스한국 & enkorea.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91222
 
 
 
 
  • e뉴스한국(http://enkorea.kr)  |  설립일 : 2003년 6월 20일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98 부산 YWCA 304호
  • 발행인 : 박수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정
  • 사업자등록번호 :  605-90-93848
  • 대표전화 : 051-462-5495 [오전 9시!오후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메일주소 : enews88@hanmail.net
  • Copyright © 2007-2009 enkorea.kr all right reserved.
e뉴스한국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