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고아의 어머니 홀트 여사
기사입력 2017.07.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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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아동복지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입양운동을 전개하며 2005년 당시 까지만 해도 8만여 명을 입양케 하여 고아의 대부로 알려진 홀트 부부. 그는 우리의 친숙한 이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40만명의 고아들이 생겨나자 고아원 등 여러 복지시설이 설립되었지만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고, 심각한 사회문제로 발전했다. 이런 가운데 해리 홀트(Harry Holt)와 부인 베르타 홀트(Bertha Marian Holt) 씨 부부는 195412월 미국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혼혈 고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아이들이라는 영상를 보며 충격을 받고 전쟁고아 입양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아동 구호사업을 시작한 밥 피어스 박사의 특별강연도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가 1955년이었다. 이들은 이미 15, 6남매를 두고 있었으나 한 달 만에 8명의 고아를 입양했다. 당시 난민구호법상 한 가정에 두 명까지만 입양이 허용되었지만 홀트씨 부부는 법개정을 청원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홀트 가정에만은 입양인원을 제한하지 않도록 허용해 주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오레곤주 크레스웰에서 홀트아동복지회의 뿌리가 되는 입양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시도는 1958년에는 홀트씨 양자회로 발전했고, 후에 홀트아동복지회라는 사회단체로 발전했다. 이 일을 위해 매진하던 남편 해리는 1964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그 일은 부인이 계속했다. 1926년 아이오와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한 홀트 여사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홀트복지사업을 시작한 1955년 이후 1985년까지 30년 간 약 5만 여명의 고아에게 새로운 가정을 갖게 했고, 입양사업도 한국 뿐 아니라 러시아, 중국, 브라질 등 세계 10여 개 국으로 확대되었다. 1995년 당시, 곧 홀트아동복지회가 설립된 지 40주년이 되었을 때는 65천여 명의 아이들이 홀트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이중 한국고아는 55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원래 홀트 씨 부부는 미국 서부지방 오레곤 주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여 거부가 되었지만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거의 모든 재산을 고아와 장애자들을 위해 쓰고 자신들은 청빈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홀트 아동복지회는 입양을 최선의 대안으로 여기지 않았다. 입양은 차선일 뿐이라고 말해왔다고 한다. 홀트씨 부부는 버려진 아이들에게 최선의 길은 자기 모국에서 따뜻한 가정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수용시설에 방치하는 것 보다는 해외 입양이 차선책이라고 말해왔다. 홀트 여사는 이런 신념으로 아동복지사업을 전개하되 기독교 정신으로 이 일에 헌신했다. 그 결과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에 홀트타운이 조성되었다.
홀트 복지재단을 시작했던 해리 홀트 씨는 1964년 사망하여 일산의 홀트 타운 뒷산에 묻혔고, 버다 홀트 여사는 2000731일 월요일 96세의 나이로 오레곤주 유진시 남쪽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때까지 홀트는 고아 7만 여명을 입양시켰고 국내에서도 17500명에게 새 가정을 찾아주었고, 그때까지 홀트국제아동복지회를 통해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은 고아들은 26개국의 20여 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홀트여사는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기에 1995년에는 한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한 바 있고, 미국에서는 가장 위대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그가 사망한 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그에게 제36회 용신봉사상을 수여했다. 홀트 여사의 시신은 한국 땅에서 눈 감고 싶다던 생전의 뜻에 따라 87일 서울로 운구 되어 9일 오전 10시 남편 묘소가 있는 경기도 일산 홀트복지타운에서 열리는 영결식 뒤 남편 곁에 묻혔다.
홀트 여사는 훌륭한 인격자였다고 한다.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이셨던 송재천(宋在千) 장로는 홀트 여사는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었을 만큼 온화하고 겸손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꼭 만나서 반가웠다는 편지를 띄울 만큼 예의바른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90노구에도 불구하고 입양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반드시 직접 축하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홀트 여사는 검소한 삶을 사셨다고 한다. 제재소 사업으로 얻은 전 재산을 한국의 고아들 혹은 장애인을 위해 썼고, 자신은 입양아들이 보내준 선물이나 낡은 조각이불로 살았다고 한다. 평소 홀트 여사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가?” 라는 물음에 하나님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홀트 여사의 친자 중 간호사인 둘째딸 말리 홀트는 195621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독신으로 살면서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선대의 유업을 위해 헌신했다. 한국명 허만리라는 이름으로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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