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효 목사의 목양칼럼 9월호 ◇

필란트로피스트
기사입력 2020.09.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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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란트로피(Philanthropy)는 친구를 뜻하는 헬라어 "Philo"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 자선, 박애 혹은 지역 사회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대상 체계를 사랑으로 돌본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Philanthropist"는 바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곧 자선가나 박애주의자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을 도운다는 개념을 물량적 가치에 고정시켜 놓고 있다. 그래서 필란트로피스트가 되려면 일단 거부(巨富)나 상당한 재산가여야 하고 적어도 언론에 대서특필 될 수 있는 상당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제스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고착되어 있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어쩌면 굵고 큰 손들의 여유 있는 사회적 마인드가 약자를 향한 측은지심에 기대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언론이나 메스컴을 통해 소개되는 필란트로피스트들은 주로 수억 혹은 수십 수백억원대의 사회 환원이라는 타이틀로 중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런 그들의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 중 어떤이는 필란트로피스트로 명예를 얻기 전까지는 일생동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구두쇠 중에 그런 구두쇠가 없을 정도로 억척 같이 벌면서도 쓰고 베풀 줄을 몰라  짠돌이라는 별명을 얻고 살아온 사람들도 더러 있다.
    노동의 최 전선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평생을 일밖에 모른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일벌레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도 한 푼 두 푼 모으는 재미를 낙을 삼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세상을 뒤집는 결단을 내린다. 사회 환원, 혹은 학교 기부 등으로 언론 매체에 도배를 한다.
    이들은 돈을 쓰 본 일이 없어 어떻게 좋은 일에 쓰야할 지를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정부나 언론 매체에 소정의 목적을 제시하고 믿고 기부하는 것이다. 과연 인류 사회를 위해 숭고한 정신을 용기 있게 실천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일생이라는 전체 생활 주기를 주고 베푸는 인생으로 살라 한다. 세상은 베풂을 돈과 같은 재물을 나눔에 무게를 많이 두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필란트로피'라는 의미가 성경에서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이웃 사랑'의 참된 뜻을 반영한 적절한 용어 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필란트로피'가 의미하는 도움의 재료가 물질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영역까지 확대하고 있어 적어도 신앙의 세계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 영적인 영역이 궁극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의 '헤세드'나 '아가페' 같은 그 근거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의미와는 구별된다.
    필란트로피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본 필자의 논리는 이 용어가 탄생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어원적 의미의 한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실천 의지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헤세드)와 사랑(아가페)에 종속시켜 그 의미를 조명한다면 복음과의 연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사회적 필란트로피스트가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의 은총을 입은 자로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신적 황금률을 실천하는 기독 자라면 말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논지는 우리 기독자들이 사회적 필란트로피스트가 되어 사회적 정신적 종교적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서 궁극적 도움이 되는 자존감을 갖고 이를 실천하자는 뜻이다.
 
    여기서 궁극의 도움이란 도움의 재료가 돈이건 물질이건 정신적인 면이건 아니면 종교적이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그 도움의 행위가 하나님 중심이 되어 헤세드(인애)와 아가페(사랑)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께 충성으로 귀결될 수 있는 구속사적 실천 의지와 능력이 어떤 대상에게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의 영생 복락이 구원의 궁극이라고 전제했을 때 그것이 필란트로피스트의 사회적 역할이 추구하는 목적으로 당연시되어야 옳다는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적선에 해적들과 함께 승선하여 해적들의 건강을 책임진 의사나 주방장 역시 해적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회적 구원, 물론 기독자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실천 의지의 과제다. 결코 기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사회화의 덕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기독자의 실천 의지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반드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신적 의지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발 도토리 키 재기 식의 세속적 논리 앞에 휘묻이 되지 말자! 그리고 그대가 기독자라면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와 비견될 수 없는 신령적 가치로 승화시켜 사회적 역할의 궁극을 신적 계획에 반영한 인생관과 사역관으로 거듭나게끔 도움을 주는 진정한 필란트로피스트가 됨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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