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호 박사의 신앙과 과학 칼럼 6

다원은 틀렸다!
기사입력 2020.08.1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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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과학에 관한 글을 쓰려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다윈과 진화론이다. 사실 진화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사물을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었다. 온갖 신화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았던 그들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장들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학 가운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엠페도클레스의 <4 원소설>이었으며, 그는 또한 식물에도 암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다소 공상적이긴 하지만 진화론을 내세워 적자생존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논리학, 자연학 등 모든 분야에서 걸출한 활약을 하여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간단하고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완전한 것으로 변하려고 애쓴다고 하면서 생물은 점점 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생물학 분야도 마찬가지로 중세의 암흑기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새로운 생각들과 주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뉴턴은 이 때 지구의 나이를 지구 크기의 백열상태의 물체가 현재 지구 온도까지 냉각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50,000년이 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특히 프랑스의 뷔퐁은 지구의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지구의 역사가 6,000년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으며, 75,000년쯤 되는 지구의 역사 속에서 42,000년경에 최초의 생명체가 지구에 나타났고, 15,000년 전에 동식물이 나타났으며, 인간은 마지막 단계인 5,000년쯤에 등장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뷔퐁은 호랑이와 사자는 본질적으로 같은 종이었으나, 원래의 조상으로부터 퇴화하여 분화된 형태라도 주장하며, 종의 기준을 생식 가능성으로 보고 현대적 종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진화론자들이 역사에 등장하였으나, 다윈만큼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는 부친의 희망이었던 의사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연에서 딱정벌레나 수집하면서 거기에 큰 흥미를 느끼면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캠브리지 대학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스물 두 살의 청년 다윈은 교수의 추천을 얻어 1831년 남아메리카로 떠나는 탐사선 비글호에 자연학자의 자격으로 탑승할 기회를 얻었으며, 1836년 가을까지 5년 동안 남미를 거쳐 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호주 뉴질랜드 등을 돌면서 자연을 탐사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5년 동안의 탐사에서 생물의 종이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과, 그 종들 사이에 변이가 매우 적다는 사실과, 또한 생물의 종들 중에는 매우 비슷한데도 분명히 동일한 종이 아닌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항해를 마친 지 6년 후인 1842년에 그는 <나의 이론>이라 하는 진화론에 대한 기본적인 스케치를 마쳤지만, 자신의 발표에 대해 난센스라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였다. 후일 그는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고 결국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맬더스는 그의 인구론에서 증가하는 인구의 위협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활력을 불러일으켜 사회에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개량”을 가져다 줄 것이라 주장한 것을 자신의 이론에 적용하므로 확신을 얻기에 이르렀다.
출판사의 자극적인 책 제목의 선택과 홍보 덕분에 1,250권을 발행한 <종의 기원>의 초판은 발행 당일 매진하는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종의 기원>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으며, 이 책의 영향은 생물학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교육학자 존 듀이는 “종의 기원은 하나의 사고방식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지식의 논리, 더 나아가 도덕과 정치, 그리고 종교를 변화시키게 되었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20세기 유명한 과학철학자 포퍼는 “다윈주의는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다”라고 말했다.
인기와 명성을 얻은 다윈은 10년 후 1870년 대담하게도 거의 망상에 가까운 <인간의 유래>를 발표하였다. 종의 기원에서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두 번째 책에서는 인간과 원숭이는 사촌이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책은 종교계와 사회 각 분야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었지만, 시대의 조류에 따라 점점 늘어가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책이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처음부터 평가받지 못했으나,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의 도입이나 무신앙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무리하게 그의 생물학적 이론을 뒷받침하여 명성을 얻기 위하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진화론의 오류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더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860년 6월에 있었던 ‘옥스퍼드 논쟁’에서, ‘다윈의 불도그’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만큼 다윈의 충직한 후배이자 동료였던 헉슬리와 당시 유명한 성직자인 윌버포스 주교 사이에 대 격돌이 있었다. 윌버포스는 다윈의 이론에 대해 30분간 조목조목 비판한 후에 헉슬리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조상은 할아버지 쪽이요 아니면 할머니 쪽이요?”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헉슬리는 당당하게 “중요한 과학 토론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자신의 재능을 쓰려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소.”하고 받아쳤다. 항상 그러하지만, 대중의 인기는 완고하게 보이는 윌버포스보다는 솔직하고 당당했던 헉슬리에게 끌렸다.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눈은 아직 거시세계도 미시세계도 지금처럼 바라보지 못했던 시기였다. 1900년대 이후 우리가 원자와 분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또한 생물학도 세포의 안을 들여다보고 또 DNA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다윈의 주장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터무니없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1980년 10월 미국 시카고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진화론 학술대회”가 열렸다. 자연사박물관장 이었던 나일즈 엘드럿지 박사는 “우리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역사, 즉 점진적 적응 변화의 역사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모두가 실제 알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120년 동안 우리에게 발견될 것이라 말하던 모형이 실재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기조연설을 하였다. 대회는 “소진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연장해서 대진화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진화론 관점에서 대전환점이 될 것이라 평가되는 중요한 학술대회였다.
<다윈주의: 신화에 대한 논박>의 저자인 발생학자인 소렌 러브트럽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다윈주의 신화는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속임수였다고 기록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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