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특집 | 6.25 전쟁기 부산에 설립된 피난민 교회 _2

전쟁 장기화로 고지대 판잣집 정착, 교회 설립
기사입력 2020.03.1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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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회 (1951. 6)
평양에서 피난해 온 김윤찬, 김세진 목사와 임종호 전도사는 1951610일 오전 11, 보수동 언덕(보수산)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 평양교회를 설립했다. 사실상 첫 피난민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독립된 교회로 출발하기 전 북한기독청년면려회 주관으로 광복교회당에서 매 주일 오후 2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청동의 부산중앙교회, 혹은 보수동의 광복교회를 전전하여 예배를 드려왔으나 늘 손님으로 치부되었고 안정적인 소속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든 중 195163, 광복교회에서 주일 예배 시 광고를 통해 이북에서 피난온 성도들을 중심으로 보수산 중턱에 모여 북한 성도연합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설립한다는 광고를 했다. 말씨나 생활습관 등에서 남한교회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성도들은 이를 크게 환영하고 예정대로 610일보수산 중턱 송림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린 것이 평양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날 예배에는 100여명이 출석했으나 두 번째 회집 주일이던 617일에는 더 많은 인원이 회집하였고, 점차 그 수는 증가하여 갔다. 세 번째 예배인 624일 보수산 서편 애린원 뒤쪽 현재의 평광교회당 자리에 군용 천막을 설치하여 임시 예배처소를 만들었고, 점차 천막을 추가로 설치하여 예배처소를 확장했다. 첫 교역자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시무했던 김윤찬 목사였고, 만주 안동교회를 시무한 후 김윤찬 목사와 함께 연화동교회를 섬겼던 김세진 목사가 동사목사로 일했다. 또 평양 연화동교회 전도사였던 최창덕, 평양 여자신학교 교수였던 임종호 전도사가 남녀 전도사로 봉사했다. 교회 설립당시 장로는 임찬익, 임이걸, 김광신, 김덕명, 김병준, 조영복, 김원보, 이종훈, 최억태, 이춘태 등 월남 전 장립을 받은 분들이었다.
평양교회는 보수산 공터에서 시작되었으나 2년 뒤에는 70평 정도의 목조건물을 지었다. 이 교회는 1959년 평광교회와 대청교회 분리되었다. 분리된 대청교회는 대청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88년 현재의 구서동으로 이전하였다.
 
선천교회 (1951. 3)
선천교회는 평북 선천출신 신자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선천출신 박괄채 집사는 동향 신자들을 규합하여 가정에서 예배드렸는데, 회집 인원이 증가하자 대청동 미문화원 건너편에 소재한 북성교회(현 대성교회)의 허락을 얻고 19513월 첫 주 오후 2시 남자 11, 여자 22명이 모여 선천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 이성호 전도사였다. 이북에서 순교한 이성주 목사의 동생인 이성호 전도사는 선천 출신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고 이들을 규합했다. 첫 담임 목사는 방화열 목사였고 전도사는 이성호였다. 장로는 박찬빈 김왕택, 집사는 박괄채였다. 19514월에는 용두산 인근의 한성중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때 86명이 회집했다. 피난민이 증가하자 교인수도 증가하였다. 후에는 초량교회 장로이자 경남도지사였던 양성봉 장로의 도움을 입어 한성중고교 주변부지 150평을 매입하여 50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1951620일 기공하여 두 달 후인 812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때참석인원은 112명이었다.
 
평북교회 (현 산성교회, 1951. 8)
평북교회는 철산교회와 선천교회가 통합되어 시작된 교회였다. 방화일 목사는 양교회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51827일 구덕동 소재 철산교회와 선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철산교회 대표 노의선 이창도 최석숭, 선천교회 대표 방화일 이성호 박찬빈 김왕택 박괄채 등은 부산 중구 대청동 265번지의 부산기독병원에 모여 양 교회의 통합을 논의하였고, 교회 합동합병협의회를 조직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했다. 그 결과 위원회는 교회명칭은 평북교회로, 예배당 위치는 대청동 용두산의 선천교회당을 사용하되 당회장은 노의선, 협동목사 방화일, 부교역자는 이성호 전도사로 정하고, 양 교회의 제직은 그대로 인정하여 통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합병이 결정되자 임시제직회를 열어 기존의 선천교회 예배당은 철거하고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용두산 기슭의 50평을 매입하여 70평 규모의 목조판자 가건물을 세웠다. 그래서 두 교회는 19521월 공식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19541210일 발생한 용두산 대회재로 교회당이 소실되어 이 교회가 1955415일에는 토성동 34번지로 이전하면서 교회 이름을산성교회로 개칭했고, 19673월에는 부민동으로, 19715월에는 다시 남구 대연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동교회 (1951)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오고 전쟁이 장기화 되자 피난민들은 길가나 고지대에 판자집을 집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용두산 공원 주변과 대신동, 아미동 지역은 판자촌으로 가득 찼다. 이런 환경에서 평동노회 출신인 위두찬 목사는 대청동 길가에 평동교회를 설립했다. 판자로 가건물을 세우고 가마니로 벽을 치고 바닥은 맨 흙이었다. 역기서 30여명의 교인이 모여 출발한 교회가 평동교회였다. 그러나 1952년 당시 용두산 피난민 촌이 대청동으로 까지 확장됨에 따라 판자로 지은 평동교회는 철거되었고 다시 복구될 희망이 사라졌다. 위두찬 목사는 안명세 장로 등 20여명의 교인을 평북교회로 보내고 자신은 서울로 이거하여 평동교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피난 원산제일교회
(현 성덕교회, 1951. 12)
원산제일교회에 출석하던 성도 30여명이 피난지 부산으로 와 처음에는 대청동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후에 성덕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원산은 함경남도 남부의 항구도시로서 부산에 이은 두 번째 개항도시였다. 이곳은 1898년 이래로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지였는데, 이 보다 앞서 내한한 게일 선교사가 이곳에서 일한 바 있다. 이곳에 설립된 첫 교회가 광석동(廣石洞)교회인데, 1893년 봉수동에 있는 게일 선교사 지택에서 10여명이 모여 시작된 교회였다. 처음에는 창앞교회 혹은 창전교회로 불렸는데, 이 교회가 함북지방 모교회로 알려져 있다. 1899년에는 교인들이 800냥의 헌금을 모아 원산항 바닷가 삼리 193번지에 교회당을 건축했는데, 한국인의 힘으로 건축한 함북지방 첫 교회였다. 이 교회는 주변지역 전도에 힘써 14년간 성진 함흥 단천 지역까지 64개 교회를 설립했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17년에는 광석동 5번지에 600여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자 형 교회를 건축하고 광석동교회로 개칭했다. 1941년에는 다시 연건평 300평 규모의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명칭을 원산제일교회로 칭했다.
그런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이들이 월남했는데, 19501227일의 함흥철수는 함흥과 그 인근 지역민의 대 이동이 시작된다. 이들은 월남하여 부산 거제도 제주도 등지로 흩어졌는데, 부산으로 피난 해 온 원산제일교회 김성호 장로는 19511213일 원산제일교회 출신 성도들을 부산시 대청동 25번지 자신의 집으로 모아 원산제일교회 시무했던 이창섭 목사와 김봉서 박흥서 이제문 등 세 장로를 중심으로 교회 설립을 의논하고, 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창서 목사가 위원장이었고, 위원은 김성호(서기) 이병식, 김봉서 홍순묵 이제문 박흥서 정현철 박승길 장로 등이었다. 첫 예배 장소는 광복동의 중앙교회당 하층에서 주일 오후 2시 회집하기로 했다. 그래서 19511216일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부산에 설립된 피난원산제일교회였다. 그 다음 주일인 1223일 주일부터는 동광동 2가에 위치한 경남부녀회관을 빌려 예배처소로 정했고, 11시 밤 7시에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김성호 장로의 주도로 19523월 대청동에 약 30평 규모의 판자집 교회당을 건축하고 330일 이곳으로 이전했다. 19521116일 주일에는 비록 피난지의 판자집 교회였으나 원산제일교회 설립 6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에는 1대 목사 박례헌, 5대 목사 정재면, 6대 목사 김상권을 비롯하여 김영제 이학봉 이승길 이창섭 목사, 그리고 배례사 선교사가 참석하여 60년의 역사를 기념했다. 휴전이 되자 일부의 성도들은 서울로 옮겨갔고 동대문구 용두동에 광석교회를 설립하였다.
19561월부터 원산제일교회를 성덕교회로 개칭하기로 하였고, 그해 315일에는 교회당을 충무동 남부민세무청사 하층으로 이전하였다. 1957623일에는 충무동 경찰병원 청사로 이전하여 19591020일까지 거기서 예배드렸다. 이 기간 중인 195876일 흥남교회 피난민으로 구성된 남부산교회와 통합했다. 남부산교회 중심인물이 김연준 장로였는데, 전쟁 중 한양대학교도 부산으로 와 남부민동에서 임시교사를 운영했다. 이때 학교 직원 등 다수가 회집했으나 휴전 후 김영준 장로와 교직원 등 다수가 서울로 돌아가자 남부산교회 운영이 어렵게 되자 원산제일교회와 통합하게 된 것이다. 교회당은 다시 충무동 골목시장으로, 충무동 4가로 전전하다가 197312월 현재의 남부민 145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이곳은 한국의 유명한 변계단 권사의 기도원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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